찬양으로 고백하는 믿음과 삶의 감사(2)
- Feb 21
- 1 min read
김수남(빌라델비아교회 권사, 작가, 코치)
실로암 - ‘광야 같은 삶에서, 보냄을 받다’
중학 3년 동안 성경을 배우고 예배드렸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모셔 들이진 못했다. 아직 나의 주님이 아니었다. 1920년생 아버지, 1926년생 어머니의 4남 3녀 중 여섯째이자 셋째 딸인 나는 부모님과 언니 오빠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막내 남동생도 마치 오빠처럼 든든했다. 5일마다 서는 운산 장에서 사 오시던 간고등어 두 손은 우리 집 저녁상을 작은 잔치로 만들었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굶어 본 적은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평범한 밥상이 이미 하나님의 돌보심이었다. 선발제인 안동여고에 합격했지만, 부모님 마음에는 기쁨보다 부담이 더 큰 농촌 형편이었다. 졸업 후 곧바로 대학에 가지 못하고 부모님 농사일을 도왔다. 고추를 따다가 마음속에서 결심이 일어났다. ‘뭔가 길을 찾아봐야겠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이셨던 송명희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이번에 학력고사를 보고 싶은데, 바쁜 부모님 곁에서는 공부할 짬 내기가 어려워요. 선생님 댁에서 공부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곧바로 “어서 오너라” 하시며 답을 주셨다. 선생님 내외분의 제자 사랑은 매일 챙겨주신 두 개의 도시락에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안동 도서관에서 103일 동안 공부했다. 짧은 준비였지만 학력고사 263점을 받았다. 만족할 점수는 아니었지만, 성적 장학생으로 갈 곳도 여럿 있었다. 더 나은 길을 권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나는 더 많은 장학 혜택과 대한항공 취업이 보장된 길을 택했다. 부모님께 빨리 힘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물을 줄도 모를 때여서 내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그 또한 은혜의 인도였다. 서울 거여동 제3공수 부대에서 근무하던 형부와 신실한 언니를 따라 다시 교회에 가게 되었고 군부대 안에 있는 비호 교회였다,
대학생이 되어 처음 다시 선 예배 자리에서 들은 찬양이 바로 많은 군인들이 힘차게 부르던 〈실로암〉이었다.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내 눈에는 아직 밤이었소~” 그 가사가 가슴 깊이 다가왔다. 내 인생도 그러했다. 앞은 아직 희미했고, 믿음의 확신도 없었다. 그러나 찬양은 자꾸만 새벽을 말하고 있었다. 실로암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목청껏 따라 불렀다. 그 노래가 나를 붙들고 있었다. 밤이라고 생각했던 그 시간이 사실은 새벽을 향해 가는 길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믿음의 확신은 없었지만,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확신보다 먼저 순종을 배우게 하셨다. 어려운 중에도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던 부모님의 사랑, 우애 깊은 7남매의 사랑. 여고 시절 나를 챙겨주신 외삼촌과 외숙모님의 조카 사랑, 공부할 기회를 열어 주신 선생님 내외분의 제자 사랑, 언니와 형부의 온 마음 다한 동생 사랑과 돌봄. 필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은 좋은 사람들을 미리 보내 두셨다. 실로암,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광야 같던 시간은 결코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새벽을 향해 떠나고 있었다. 보냄을 받은 사람으로, 주님이 예비하신 자리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고백한다. 그 길 끝에서 주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음을. 그리고 마침내, 스물이 된 어느 날, 나는 눈을 뜨게 되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