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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에서 회복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

  • May 8
  • 5 min read

크리스토퍼 랜드(Christopher D. Land), 맥마스터 신학교, 신약 교수)


크리스토퍼 랜드 교수는 2013년에 맥마스터 신학교의 신약신학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현재는 “성서 언어학, 번역, 주해 센터” 소장과 “OpenText.org 프로젝트” 개발도 함께 담당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랜드 교수의 연구 관심 분야는 현대 언어학적 방법론을 신약성경 연구에 적용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는 그리스어 일반 문법과 구조, 본문 중심의 주해적 논의, 사도 바울의 생애와 신학 연구를 수년간 수행해 왔다. 또한 교회의 성경 읽기 운동과 리더십 훈련과 관련된 실천 신학 분야에도 기여하고 있다. 현재 크리스토퍼 랜드 교수는 해밀턴 동부 지역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설교하고 찬양을 인도하며, 그 외에도 성경 공부, 소그룹 사역, 예배 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지도하고 있다.


번역: 박성민 교수(맥마스터 신학교, 목회신학교수)

모든 기고문의 한글판 번역으로 섬기신 박성민 교수에게 감사드립니다


어떤 신학 운동이든 목회 운동이든, “모든 것을 뒤엎고 새롭게 하자!”고 외치는 일은 쉽습니다. 이때 기성세대를 자신과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로 여기면, 기존 체제를 비판하면서 만족감을 느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시도가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비판으로 시작한 새로운 물결도 시간이 흐를 수록 어려움을 맞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세대도 결국 언젠가는 기성세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성세대가 되고 나면 새롭고 신선하다는 평가보다는 진부하는 평가를 더 많이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전 기성세대를 비판하던 기준이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또한, 스스로 선언한 가치를 삶에서 실천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새로운 운동이라 할지라도 성경과 전통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다양한 흐름을 막기는 어렵고, 결국 내부적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런 순간에 처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함’을 외부로부터의 비판과 공격에 맞서 우리의 신앙과 실천이 옳다는 것을 강하게 변호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나의 신앙과 삶이 적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성경적이라는 것을 증명해 이기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함’이라고 여기게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과연 이러한 논쟁과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진정한 ‘신실함’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씀하는 ‘신실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먼저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최근의 많은 연구는 초대교회를 ‘유대교 내부에서’ 등장한 새로운 운동으로 묘사합니다. ‘유대교 내의 바울(Paul within Judaism)’ 연구 경향과 더불어, 이제는 ‘유대교 내의 요한(John within Judaism)’을 비롯해 다른 성경 저자들에게도 유사한 접근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에는 학문적으로 설득력 있는 측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저 역시 이러한 주장들의 배경이 되는 유대교 기원 가설의 약점들을 알고 있으며, 이 가설의 모든 부분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들이 제기하는 기본적인 사회학적 명제만큼은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즉, 예수님과 초기 제자들은 자신을 유대인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동시대 유대인들을 비판하신 내용은 자신과 무관한 외부 집단을 향한 비판이 아니라, 유대교 내부를 향한 자기비판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유대인을 비판한 것도 유대인으로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내부 비판의 태도는 최근 학계에서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 아닙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도 종교개혁 시대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개혁주의는 본질적으로 자기 비판적 태도에서 시작된 것이며, 이러한 태도는 이미 신약성경의 매우 초반부터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가에 서서 이방인이 아니라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마 3:9)는 그의 외침은, 유산과 전통에 근거하여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공동체라고 여기는 자부심을 비판적으로 돌아보자는 뜻입니다. 대신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마 3:8)고 촉구합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를 진솔하게 돌아보며 개혁하라는 강력한 부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동일한 패턴을 따릅니다. 예수님의 가장 강한 책망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스스로 성경의 수호자라고 자처했던 유대인들에게 향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 15:3)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민족에게 말씀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그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켜 회복할 수 있도록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네 눈 속의 들보를 먼저 빼어라”(마 7:5)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역시 ‘참된 회복과 개혁은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에서 시작된다’라는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드러내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외부에서 비판하는 세력을 차단하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려는 태도로 시작 된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진솔하게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과정을 시작으로 성령 충만한 공동체로 성장해 갔습니다. 유대교 내에서 ‘무엇이 성경적인가?’ 라는 주제를 두고 논쟁이 계속되던 가운데서, 예수님과 초기 제자들은 기존의 유대 집단들 모두가 참된 신실함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곧 담대한 신앙 고백으로 이어졌습니다. 바로, “우리는 성경적이지 않다. 우리는 신실하지 않다!”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을 중심으로 1세기 유대교에 두 그룹이 생겼습니다. 첫째는 비판에 대응하기 위하여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을 변호하며 정당화하기 위한 ‘성경적 근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가르침을 수용한 사람들은 마음과 뜻을 함께 하며 모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초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은 유대교 안에서 하나의 그룹을 이루어 개혁적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 그룹은 점차 새로운 정체성을 갖추기 시작했고, 결국 오늘날 우리가 ‘기독교’라고 부르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성경을 어떠한 방식으로 대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들도 주위에서 종종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들’의 신앙과 삶이 더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자기를 돌아보는 과정 없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데 성경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의 증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성경적’이라는 것은 예수와 제자들의 본을 따라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보는 일을 반드시 포함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 속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우리는 성경적이고 너희들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 민족을 마음에 품고, 그 민족 안에서 ‘우리 모두 함께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자’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 부름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과연 참으로 신실한가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전 세계 교회, 그리고 캐나다 교회를 포함한 모든 교회에 도전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저는 백인 캐나다인 성서학자로서 한국의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에게 글을 쓰고 있는 만큼, 제가 ‘외부인’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인정하고자 합니다. 저는 한국 교회 안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할 수 없으며,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방식으로 한국 교회의 역사나 현재의 어려움을 이해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말씀드릴 기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며 제가 발견하는 한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돌아보도록 촉구하는 목소리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이 과정에서 ‘성경적’ 태도란, 우리 공동체 안의 특정 인물이나 그룹을 비판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모두가 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겸손히 살피려는 태도를 포함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와 디아스포라 한인 교회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성장의 이면에는, 많은 한인 교회 목회자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힘들고 고된 사역을 감당해 온 희생이 있었습니다. 긴 노동 시간, 세대 간 갈등, 문화적 압력, 재정적 제약, 그리고 이민과 정체성의 문제를 헤쳐 나가는 공동체를 돌보는 데 따르는 감정적 부담, 등등 많은 것들이 한인 목회자들의 어깨에 여전히 놓여 있습니다. 한국인 목회자들의 인내심와 신실함은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국 교회가 확고히 자리 잡아 존경받는 공동체가 된 만큼,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자기 성찰의 부름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된다고 일관되게 경고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7절은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될 때가 되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스스로 살필 것을 촉구받았고 (신 10:12–22; 사 1; 암 5; 미 6),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기대와 생각을 바로잡으라는 도전을 받았으며(막 8:33),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책망과 함께 회개하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계 2–3).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면, 비판적 관점에서 시작되는 개혁은 이미 하나님을 아는 공동체 내부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오늘 우리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 안에서 교회가 ‘성경적’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확립되고, 일정한 영향력과 다양성을 갖춘 전통 안에서 건설적인 자기 비평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 또한 지나친 자기 정죄나 파괴적 갈등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회개와 개혁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떠한 비판도 반드시 사랑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도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세운 교회들을 꾸짖은 것도 그들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워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적 비판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행위이며, 적대가 아니라 사랑의 표현입니다.

신약학자로서 제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성경적이라는 것은 반드시 철저하면서도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을 포함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들’과의 대비를 통해 단순히 ‘우리’를 신실한 공동체로 규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광야에서 외치는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 3:2).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회개를 통해 개혁되고 회복되는 것도 가까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하나님 말씀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날마다 주님의 은혜로 회복되어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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