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고 싶지 않은 얼룩
- Mar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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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로사 작가(본보 주필)
살다 보면 믿기지 않는 일들을 겪게 된다고는 하지만 이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침에 안부를 묻는 전화 통화를 했는데, 점심때 그녀가 고인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저녁에 그녀의 주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생명이 거두어져 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걸 알고 있기는 했지만, 황망하다는 게 이런 걸까. 그날 아침, 잘 지내냐는 인사 전화를 했는데, 보통 때와 달리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왜 이렇게 식은땀이 나는지 모르겠어’라고 하더니, 뒤를 이어서 하는 다음 단어가 입속에서 흩어지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당황한 나는 ‘얼른 병원에 가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고, 전화 소리를 듣고 달려온 그녀의 남편 장로님이 응급실로 급하게 옮겼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평소와 별다르지 않게 흘러갈 평범한 날이었고, 여느 때와 같이 유유자적하는 하루를 보낼 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뇌출혈은 느닷없이 그리고 가차 없이 생을 안쪽에서 바깥으로 밀어버리는 강력하고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삼십여 년 전, 내가 캐나다 이민을 준비하고 있을 때,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심방을 오셔서 낯선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너무 좋은 분들이니 토론토에 가면 꼭 만나보라'며 귀한 만남이 될 거라고 했다. 뿌리째 삶을 옮기는 게 쉽지만은 않았던 터. 살 집을 정하고, 일자리를 알아본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자리를 잡았을 무렵, 그 메모지가 생각났다. 전화를 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 따뜻하게 응대를 해주던 그분들과 처음 만남을 갖게 된 건, 어느 봄날이었다. 날씨만큼이나 온화한 첫인상의 두 분이 웃으며 손에 무언가를 쥐어 주었다. 투명 비닐봉지에 담긴 참나물이었다. 한국에서도 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캐나다에서 참나물을 먹게 되다니. 고소하고 감칠맛이 나는 참나물은 이국에서 느끼는 고향의 정서를 물씬 느끼게 했다. 그렇게 시작된 그분들과의 인연은 가족이라도 되는 듯 여물어 갔다. 작은 시골, 용문 출신답게 손맛이 배어있는 맛깔스러운 음식을 베풀어주었고, 때때로 이민 생활 속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도 친정 언니처럼 들어주던 존재가 사라졌다는 허전함이 나의 일상을 무겁게 지배했다. 누구는 큰 충격으로 휘청거리는데, 세상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돌아가는 걸 보는 것 조차 힘들었다. 우울증이 찾아와, 어스름이 내리면 그냥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마음이 모래 상자가 되어 침대에서 뒤척일 때마다 움직이는 쪽으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무기력하게 침략당한 채,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에서 현실로 돌아올 때마다 가슴에는 얼룩이 남았다. 어쩌면 나의 내면은 살면서 겪은 수많은 얼룩의 무리로 채워져 있는지도 모른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도 있지만, 무의식 속에 박혀있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 툭 튀어나오거나, 뭉근하게 번져 나오기도 한다. 흰 셔츠에 스며든 커피 자국처럼 지우려고 애써도 잘 되지 않았던 얼룩들. 그 위에 슬픈 이별의 얼룩이 또 하나 덧입혀졌다. 얼룩은 노력해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체념하듯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자국이다. 그러나 이번에 겪은 이별은 오래도록 지우고 싶지 않은, 아니 간직하고 싶은 얼룩이다. 카톡에도 이름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녀는 평소에 지녔던 품성처럼 장기와 뼈를 기증하여 몇 사람의 생명을 건져내고 홀연히 떠났다. 장례식의 비통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고인의 생전 사진들이 파노라마로 지나가고 있었다. 바로 며칠 전에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도 있었다. 그 미소도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경계 너머에 있다는 걸 생각하니, 전기가 찌르르 속을 아프게 훑고 지나갔다. 조금 더 시간을 같이 보낼 것을…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고인의 얼굴은 평온했다. 어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채, 기다렸던 것을 이룬 것처럼 부드러웠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고통도 비애도 느껴지지 않는…. 평소처럼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와있는 이곳은 괜찮으니 슬퍼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슬픔을 머금은 위로가 잔잔하게 내 안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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