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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관

  • May 8
  • 3 min read

황로사 작가


의사는 귀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얼마 전 갑자기 생긴 어지럼증 때문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침대에 눕는 순간, 천장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더니 시속 백 킬로미터의 느낌으로 방 전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떨어질 것 같아 소리를 지르며 침대를 꽉 붙잡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세상도 나도 돌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러나 정신 못 차릴 만큼 돈다고 느끼는 것도 나에게는 현실이었다. 그 후 한 동안 균형을 잡을 수 없는 그 증상이 다시 올까 봐 겁이 나서 살살 걷고 위를 쳐다볼 때는 뭐라도 붙잡으며 지내야 했다. 손가락 마디 반 만한 작은 것 하나가 내 몸 전체를, 중심을 못 잡게 하고 쥐락펴락한다고 생각하니 왜 갑자기 그 친구가 떠오르는 걸까…!


이민 생활 중에 추억을 공유한 지인을 만나는 것은 나른한 일상을 깨워주는 즐거움이다. 직장에 휴가를 내고 서울에서 방문한 그녀와 같이 하루를 보내기로 계획을 세웠다. 육십 킬로미터가 되는 먼 곳으로 목적지를 잡고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인생이 익어가는 나이에 오랜만에 만났으니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내 기대와는 달리, 그 친구는 설교하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이 가장 올바른 양 가르치려 들고 나의 의견은 차원이 낮은 것처럼 일축해 버리는 식이었다. 탁구공처럼 주고받는 대화를 기대했지만, 일방적인 스매싱으로 인해 나는 속으로 신음소리만 삼키고 있었다. 근 십 년간 안 본 사이에 이 친구가 왜 이렇게 주장이 세졌는지 의아스러웠다. 가슴 속에서 기포마냥 보글거리던 스트레스가 차츰차츰 올라와 어깨에 멈추더니 운전하는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차 안이라는 공간은 잠시라도 피할 수 없고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럴 때는 큰 문제였다.


오 년 전 그 친구가 암에 걸렸다는 것을 다른 지인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곧 들려오는 소식은 신앙인인 그녀가 의사의 도움 없이 기도로 낫겠다고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의지 덕분인지 신의 뜻인지 아무튼 경과는 좋았다. 암은 사라졌고 내년이면 완치판정을 받는다고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 경험마저 그녀가 설교를 자신 있게 하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암은 수술하면 안 되는 것이고 자신의 경험만이 정답인 양 이야기를 했다. 수술해야 할 상황에 있는 사람이 옆에서 듣는다면 상처를 받고도 남을 만한 언사를 거침없이 하고 있었다. 멀리서 온 사람이니 묵묵히 참자고 다짐하며 손님 대접을 하고 돌아오니 온몸이 피곤함으로 절여진 것 같았다. 패잔병마냥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누워서 생각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걸까.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 하나가 마음 가운데 툭 던져지자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맞는 대답을 찾으려고 해도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섬광처럼 마음에 들어맞는 것이 떠올랐다. '말씀으로 중심을 잘 잡고 사는 거야...' 찾고 있던 퍼즐 조각을 발견하고 아귀를 맞춰 끼운 것처럼 그제서야 가슴 속에 일던 파동이 멈췄다.


나는 얼마 전까지도 자존감이 낮아서 마음에도 없는데 이리저리 줏대 없이 끌려다닌 적이 많았다. 그러다가 K 목사님의 설교에서  '자존심'과 '자존감'의 정의를 명쾌하게 내려주는 것을 듣고 온 마음으로 공감을 한 뒤로는 그것을 되새김하며 살려고 노력했다. 자존심은 '남과 비교하면서 자기의 품위를 지키려는 것'이며, 자존감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기까지 하셨으니,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그 정체성으로 품위를 지키고 사는 것'이라고 강사는 설명했다. 그 후로는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내면이 강해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런 나 자신을 좋아하게 되니까 남도 더 귀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삶은 관계다.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깊숙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내 감정과 생각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시야로 분별하면서 사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상대방의 의견도 존중하면서 자기의 생각을 내놓을 때 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친구가 보여준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닮고 싶지 않은 반면교사의 역할을 해줘서 고마운 것도 있지만 당분간은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걸 보니 그 시간이 많이 힘이 들긴 했던 모양이다.


 귀 안에 박혀있는 미물같은 달팽이관이 자리를 잡지 못하니 온 세상이 흔들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중심을 잃으면 살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인간관계도, 나의 삶도 흔들릴 것은 불 보듯이 뻔한 일이다. 태풍이 불어올 때 이리저리 휘 몰리며 살 것인지 태풍의 눈 속처럼 평정 가운데 있을 것인지는 이제 나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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