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適者生存)
- Jun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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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 목사
올해는 로빈이 집짓기를 포기한 모양이다. 우리 집 뒤뜰 쪽 외등 위에 삼사 년 짓던 집을 짓지 않는다. 작년에 까마귀가 와서 다 키워놓은 새끼를 낚아채 가고 난 것을 어미 로빈이 보았기 때문일까. 그때 나는 자연 세계의 잔인한 원리를 보았다. 평화로운 6월 초순 오후, 한가하게 낮잠을 청해도 좋을 그 시간에 느닷없이 닥친 포행자의 만행은 한 집안의 행복을 순식간에 망가뜨려 버렸다. 그곳에 로빈의 보금자리와 성장하는 새끼가 있는 줄 그놈은 어떻게 알았을까. 불쌍한 로빈, 그에게는 어디에도 안전하게 집 지을 곳이 없다. 뒤뜰 전나무 가지에 집을 지으려 해도 거기에는 다람쥐가 해코지한다. 그런데도 용하게 그러한 위험 요소들을 피해 해마다 때가 되면 집을 짓고 알을 낳아 부화해서 새끼를 성공적으로 키워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을 보면 측은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내가 십여 년도 더 전 버팔로에서 목회할 때 살던 사택 바로 옆 공간에 어린 전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었다. 로빈이 그 전나무 중 한 곳을 택하여 집을 장만하였다. 다람쥐가 해코지할 만한 장소 같은데 아마 거기가 최적지였던 것 같다. 낮은 땅과 높은 하늘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머리가 좋지? 나무의 중간쯤, 지상에서는 1.5m 정도의 높이였다. 다람쥐의 눈을 피하기에도 안성맞춤인 장소 같았다. 나는 그해 거의 매일이다시피 어미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에서부터 새끼가 부화해서 자라 둥지를 떠날 때까지 유심히 관찰했다. 어미 로빈은 부지런하고 똑똑하고 빈틈이 없었다. 누가 새끼에 대한 저 애정과 지혜를 품부했을까?. 저는 생존이라는 단어조차도 모르겠지만 저렇게 새끼를 키워 성인이 되게 만들어 내보내는 일련의 모습에서 경이로움 마저 들었다. 본능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없을 만큼 너무 신기하다. 새끼가 커 갈 때에는 연신 벌레를 잡아다 먹이기에 바빴다.
해마다 삼월 중순이 되면 이곳 내가 사는 토론토에 로빈이 나타난다. 저 친구들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닐진저. 혹한에 얼어 죽지 않고 어딜 갔다가 살아서 다시 이곳에 오기까지는 수많은 난관과 위험을 넘기고 난 후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약육강식의 무서운 질서가 존재하는 곳이 자연계이다. 그러한 장애 요소를 해치고 살아남아 다시 왔다. 나는 어느 해 뒤뜰 텃밭에 상추를 먹으러 나타나던 토끼를 보았다. 거의 매일 나타나서 상추를 먹고 갔다. 제가 먹은들 얼마나 먹으랴 싶어 내버려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뒤뜰 잔디 위에 토끼털과 몸 일부가 널브러져 있었다. 밤에 어떤 힘 센 놈이 와서 토끼를 잡아먹은 모양이었다. 순한 동물에게 밤은 저승사자가 오는 때이다. 어떤 놈일까. 여우, 아니면 라쿤일지 모른다. 토끼 사체를 뒤뜰에 땅을 파고 묻어주었다. 이튿날 아침, 묻었던 곳이 파헤쳐져 있었다. 땅속에 묻어둔 사체까지 깡그리 먹어 치웠다. 다시 한번 치열한 생존 세계를 목격한 셈이었다. 어느 해엔가는 앞뜰에서도 같은 모양을 보기도 하였다. 동네를 걷다 보면 가끔 토끼를 보게 된다. 그러나 저 토끼가 언제 어떤 짐승의 밥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먼저 한다. 토끼가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감정에 앞서 항상 갖는 마음이다. 토끼는 번식력이 강하지만 주위에 산재해 있는 적들 때문에 살아남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많이 잡아먹히다 보니, 살아남은 저를 어쩌다 한 번씩 보게 되는 것 같다.
어느 더운 여름날 이른 아침에 걷기 운동을 나갔다. 얼 헤이그 고등학교 앞을 지나다 여우와 맞닥뜨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놈을 주시했다. 여우 앞에 다람쥐가 나타났다. 여우는 쏜살같이 다람쥐를 추격, 금세 잡은 놈을 입에 물고 어느 집 울타리 사이로 사라졌다. 여우가 아침 식사 거리를 장만 하러 거기에 나타났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다람쥐가 여우의 밥이라는 것도 말이다. 친구에게 그 이야기했더니 토론토에는 약 5천 마리의 여우가 살고 있다는 친절한 정보까지 알려주었다. 그러나 여우를 해치거나 죽이면 벌금을 매긴다는 말과 함께였다. 저 못된 놈을 작살을 내지 않고 보호해? 역시 캐나다라서 그런가. 그렇다고 강한 놈만 사는 세상은 아니다. 아프리카의 초원에는 사자만 살지 않는다.
인간 세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강한 사람,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만 사는 세상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도 바빌로니아나 페르시아 제국은 건재해야 하고 히틀러의 독일과 도조의 일본은 세상을 지배해야 옳다. 인간의 생각을 넘어선 초월적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가 있다. 그 질서는 인간의 손을 떠나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사람은 연민과 사랑으로 산다고 하였다. 고아, 과부, 빈자, 장애인, 무능력자도 산다. 연민과 사랑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강도와 도둑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고 연민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오늘도 되돌아오지 않을 로빈의 빈 둥지를 상상하면서 시름에 젖는다. 그러나 그 시름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넘어 다시 어느 곳에 새끼를 낳아 기를 적소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생을 이어갈 것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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