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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환자는 처음이라 - 다섯 번째 이야기

  • Mar 12
  • 1 min read

김초희 목사(노스욕 한인열린교회)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예전에는 오래 살 것을 대비해 치매 걸리지 않는 지식 습관들을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환경에 따라 마음이 변하나 보다. 이제 치매는 안 올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고 가끔 농담처럼 넘기며 웃는다. 완치가 없는 유방암, 그러나 생존율이 90%나 된다. 방사선이 끝난 1월 증순, 나는 중단했던 목사님들과의 줌 미팅 스터디를 시작했다. 늘 기도해 준 팀이고 내가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을 잊어 버리게 한 분들이라 멤버 권유를 거절하지 못했다. 2주 정도는 등과 눈이 좋지 않았지만, 그 후부터는 페이스를 지키게 되었다. 어려움 속에서 버틴 우정은 우리를 단단하게 만든다.


최근에 수술한 부위가 한쪽으로 몰려 딱딱해졌다. 나는 집에 온 작은 아이에게 부위를 보여주며 어떡해, 라며 울먹였다. 몸의 불균형이 갑작스러웠던 것이다. 아이는 침착하게 의사와 간호사의 말을 기억하곤 살짝 웃었다. 마사지를 해 주어야 한단다, 나는 밤에 마사지를 하며 조금 강하게 문질러 주었다. 마시지 효과는 놀라웠고, 다음 날 100%가 사라져 마음엔 평안이 찾아왔다. 아이들도 자라면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건강지킴이가 되나보다.


나는 9남매의 막내로 자라 아버지 껌딱지로 자랐다. 아버지는 일찍 천식이 찾아와 늘 집에 계셔서 책을 읽으셨기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아버지를 찾았다. 죽음의 한계를 알게 된 지금 떠올리면, 웃음 가득해지는 행복한 추억이다. 어릴 때 몸이 약했던 나와 사촌은 비가 오는 날이나 추운 날이면 동네를 벗어나도 곧 돌아왔다. 그래도 어린 딸을 반갑게 맞아주시던 아버지, 어머니의 심부름을 피해 책을 들고 아지트로 갔다가 돌아와도 야단치지 않았다. 가난이 익숙했던 그 시절 예수님을 믿는 어린이에게 가난은 힘을 쓰지 못하고 행복했다. 아프고 난 후, 자주 조국이 그립고 언니와 오빠들이 보고 싶을 때면 옛일이 추억되어 자주 눈물이 났다. 그렇지만 여름에 덥지 않은 토론토가 나에게 최상의 나라여서 그리움은 댓가라고 생각하며 지낸다.


2월 마지막 주 화요일 목사사모 합창단에 1년 2개월 만에 출석하였다. 토론토에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나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해 주신 분들을 새로운 가족으로 깊이 사랑한다. 끝으로 환우들이 읽으신다면, 부담되지 않는 범위에서 일상의 일들을 해 보시기를 추천한다. 체중이 즐고 가발이나 모자를 벗지 못할 때, 머리 손질이 편하고, ‘무료 다이어트도 되어 다행이다!’ 생각하며 위로하시기를 감사를 담아 소원해 본다.


(편집자-투병중에도 미션 캐나다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으로 인해 원래 3회 연재키로 했던 글을 5회로 연장하여 실었다. 김초희 목사의 건강이 속히 회복되어 예전보다 더 열정적인 목회사역과 삶이 펼쳐지기를 소망하며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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