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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 각

  • Jul 25
  • 3 min read

김용출 목사(은퇴목사. 캐나다 신학교 이사장)


벌써 일 년 전 일이다. 어떤 목사님과 차를 타고 가면서 대화하다가 그분이 나에게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다 읽었느냐고 물었다. 내가 조정래의 소설 이야기를 먼저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원고지 1만 5천 매가 넘는 엄청난 분량이다. 나는 그 전체를 다 읽지 못했지만 1부 2권인가, 3권인가를 다 읽었다. 그래서 다 읽었다고 했다. 그런데 기억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읽은 지 벌써 이십 년도 넘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박경리의 토지도 완독은 아니었지만 상당 부분 읽었다. 이문열의 소설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하소설 형식으로 쓰인 조선 오백 년사, 삼국지, 한국교회 백년사 등 그 외에도 많은 장편소설들을 읽었다. 동서양 장편 고전도 많이 읽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어느 것도 기억에 남는것이 없다. 건망증? 아니다. 망각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하나에 나오는 인물들만 해도 많고, 더구나 대하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자니 그 이름들을 기억할 수 없다. 이름은커녕 줄거리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 읽는 대로 다 잊는다. 그래야 내 머리가 견디어 낼 것이다. 다 기억할 수도 없지만 다 기억하고 있다고 해보라. 머리가 복잡해 살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책을 읽고 중요한 말과 이야기를 간단하게 기록해 두는 습관이 있다. 설교에 인용하기 위한 목적도 있고, 또 기억하고 싶은 말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록해 두는 노트(컴퓨터 노트가 아닌 종이 노트를 말함) 가 많아서 알고 싶은 것을 찾으려고 하면 그 많은 노트를 다시 뒤져야 한다. 그래서 노트에 기록해 두는 것도 한계가 있다. 컴퓨터에 저장하는 것도 분량이 많아지니 찾기가 쉽지 않다. 요즘은 필요한 말이나 글이 있으면 인터넷에 들어가 찾아보기는 하지만 어떤 용어나 글, 이야기 자체가 생각나지 않으면 인터넷에 들어가 찾는 자체가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어떤 clue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인간의 기억력이 대단한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실로 하찮은 것 같다. 대개는 어릴 적 기억은 오래오래 기억하지만 나이 들어서 기억은 잊어버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 역시 어릴 적 기억은 아직도 생생한 것이 많다. 그러나 중년을 넘어오면서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은 제한적이고 많지 않다. 6.25 전쟁 76년이 되었다. 내 나이 만 여덟 살이 되기 전이다. 그때의 기억은 생생한 것이 많다. 할아버지와 함께 마을 건너편 앞산 골짜기에 피난한 일, 그때 아버지는 이미 전쟁을 피해 멀리 남쪽으로 피난 가고 난 후였다. 군대에 징집되기에는 나이가 넘었지만, 그 대신 군수 물자를 운반하는 보국대에 징집될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앞산 골짜기에 피난한 우리 가족이 그날 밤을 지나기 전 오후, 군화에 허름한 바지, 여름 러닝셔츠, 그리고 총을 멘 국군 아저씨가 낙동강 전투에서 패한 채 남쪽으로 후퇴하는 모습을 보았다. 어린 내가 보아도 처량해 보였다. 곧이어 산등성이를 타고 인민군 정복을 한 군인들이 질서정연하게 내려왔다. 조금 전 후퇴한 국군 아저씨의 복장과는 너무 대조되었다. 그 인민군이 우리 할아버지를 보고 왜 여기서 고생하느냐 집으로 돌아가시라, 곧 남조선이 해방되어 살기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나는 어렸지만, 그 말을 할아버지 옆에서 듣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 마을을 점령한 인민군이 동사무소에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이라는 군가를 가르쳐주었다. 정훈교육인 셈이었다. 인민군은 그렇게 발 빠르게 모든 것을 진척시키고 정신교육을 시키는 것 같았다. 얼마 후 인민군은 우리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더위가 이어지는 한여름, 동네 사람들이 모여 삼 굿을 할 때 국군 폭격기가 와서 모여 있는 동네 사람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하였다. 모두 깜짝 놀라 풍비박산 흩어졌다. 나는 형과 함께 강물에 뛰어들어 피신했다. 그때 기총소사에 북촌 할아버지라고 알려진 분이 세상을 떠났다. 또 어느 저녁, 해는 지고 어둠이 찾아오는 시간, 나는 누님과 함께 외가로 피난을 가야 했다. 우리 마을엔 폭격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골목을 빠져나가다 검은 고무신 한 짝을 잃어버렸다. 어두워서 찾을 수가 없었다. 해가 진 밤하늘에서의 폭격은 불똥이 떨어지는 것으로 금방 알아차렸다. 너무 급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신 한 짝은 찾지도 못한 채 피난 길에 올랐다. 우리 집은 폭격에 대비해서 방 가운데 농을 놓아두고 폭격 소리가 나면 농으로 들어가서 피신했다. 그때 제일 어린 동생 용학이 엉금엉금 기어서 농으로 들어가곤 했다. 뒤뜰 텃밭에는 방공호를 팠다. 폭격 소리가 나면 우리 형제들이 방공호에 들어가기도 했다. 만약 방공호 위에 폭탄이 떨어진다면 몰살했을 것이다. 우리 집 뒷산 낮은 곳에 평평한 평지가 있었다. 저녁을 먹고 폭격을 피해 그곳에 가서 잠시 머물다가 집으로 내려오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인민군이 물러가고 국군이 진격하면서 국군 두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와 수색을 했다. 총을 겨누면서 남자가 있느냐고 방앗간에서 방아 일을 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물었다. 피난가고 없고 아이들뿐이라고 했다. 국군은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 토깥의 고모할머니 댁에 피난한 일도 있었다. 그때 한여름 밤 할머니 댁의 젊은 고종 누나가 자기 무릎을 베개삼아 나에게 잠을 청하도록 하였다. 그 따스하고 친절한 온기가 지금도 느껴지는 기분이다. 잊을 수 없다. 그 누나가 그립다. 때로는 폭격기 소리를 들으면 동네의 큰 나무에 올라가 피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 여름은 저물어갔다. 그때의 기억이다. 많은 것의 망각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때의 기억은 무슨 작용에 의한 것일까. 아직도 어릴 적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오늘의 나에게 망각이 아닌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6.25 노래의 첫 소절이다. 인간은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망각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유대인 6백만 대학살을 기억하는 예루살렘 기념관 현판에는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라고 쓰여 있다. 잊지 않아야 할 것을 잊는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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