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 Jul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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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수필가 김덕원
“나의 자유가 제한되고 있다. 내 영혼이 육체에 갇히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행위의 목적과 조건에 따라서 “자유”는 많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개념이지만, 일반적인 정의로는 “내·외부로부터의 구속이나 지배를 받지 않고, 존재하는 그대로의 상태와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정의대로라면 나는 분명 자유를 잃고 있는 셈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내 몸이 더 이상 허락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창 젊었을 무렵 체력을 과신한 나머지 무리한 힘을 쓰는 바람에 목 디스크가 시작되었다. 수술할 만큼은 아니어서 그냥 지나쳤는데, 그 주변으로부터 시작해서 허리까지 대부분의 디스크 사이에 칼슘이 축적되는 증상이 시작되었다. 목을 움직이는 반경이 조금씩 좁아지고, 등이나 허리도 예전 같지가 않다.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 밧줄이 사지를 묶고, 온몸을 조여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처음부터 그런 상태였다면 불편하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일이겠지만, 원하는 대로 잘 따라오던 몸이었었기에 불편함을 넘어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다.
“자유는 형벌에 가까우므로 오히려 결속이 참 자유라고 생각한다.” 사르트르의 말이다. 이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해된다는 것이 더 슬프다. 한번 주어진 자유를 다시 반납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만큼 가혹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형벌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얼마 전 태어난 라이아[손녀]의 모든 감각이 배고픔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배가 고프면 울고, 배가 채워지면 잠을 잤기 때문이다. 그땐 누구라도 젖병을 물려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사 개월이 지난 지금은 전혀 다른 아이가 되었다. 배고플 때만이 아니라, 불편할 때도, 잠이 올 때에도, 뭔가 마음대로 안 될 때도 운다.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입으로만 느끼던 감각이 이젠 눈, 귀, 그리고 코의 감각을 통해 엄마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두워지면 엄마만이 답인 셈이다. 나 역시 오감을 통해 세상을 이해했다. 눈으로 사물을 구별하고, 귀로 소리를 분별했다. 코로 좋은 냄새와 나쁜 냄새를 가려내고, 입으로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골라냈다. 손가락과 온몸의 감각을 통해서 가까이할 것과 멀리할 것들을 분별해 냈다. 그렇게 나는 내 몸의 다양한 기관들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그때의 내 몸은 나를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는 멋진 도구가 되어 주었다. 내 영혼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통로가 되어 준 셈이었다.
불가에서는 “죽음이 오히려 자유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것조차 이해가 되는 것이 또 나를 슬프게 한다. 세상으로부터 밀려오는 온갖 유혹에 현혹되어, 욕망과 욕심으로 달구어지는 몸 때문에 영혼마저 평정심을 잃어버리게 되니, 그 육신을 버리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내 몸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일을 계속해서 주문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욕심이든, 욕망이든, 아니면 잘 포장된 비전과 꿈이든 다를 바가 없다. 어떤 이유이건 몸은 그만큼 혹사당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으로부터의 자유와 노동을 통한 자유는 양립할 수 있는가?” 고전적인 질문에 문득 생각이 멈춘다. 끊임없이 인간을 속박하는 것이 노동의 현실이지만, 인간의 삶을 이루는 근본적인 활동이기도 하기 때문에 제거될 수도 없는 것이 노동이다. 삶은 항상 이율배반적인 구석이 있다. 몸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때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그 몸이 나를 세상으로부터 단절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몸의 모습이 바로 그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다. 버릴 수도, 그렇다고 그 안에 갇혀만 있을 수도 없는 현실 속에 내가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나에게는 몸으로부터의 자유와 몸을 통한 자유가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
빛이 없고 소리가 없는 세계에 갇히고 만 헬렌 켈러는 유일하게 남아 있던 촉각에 의존해 언어를 깨닫게 되었을 때, 그의 영혼이 깨어났다는 고백을 했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다. 지적, 사회적 울타리는 물론, 장애의 울타리까지 넘어설 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나에게 남아 있는 오감이라고 하는 것은 가히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왜 나는 내 자유가 제한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일까? 나는 “속박”이라는 단어를 가장 싫어했다. 돌이켜보면 지금의 순간에 멈춰 서지 않고 늘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성향도 어쩌면 시간과 공간에 속박되지 않기를 원하는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자유를 동경하고 갈망해 온 나였는데, 부자연스러워지는 몸이 나를 그곳에 멈춰 서게 하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병원에 입원한 지인이 몇 주밖에 살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간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온갖 격려의 말로 위로하던 이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그만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루도 남지 않은 인생이 몇 주나 더 남은 인생을 위로한 셈이 된 것이다. 참 우스운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이렇게 들렸다. 희망 있는 사람이 절망에 빠진 사람을 위로한 것이다. 어쩌면 정답은 내가 처한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희망” 아닐까? 누에고치 속에 자신을 가두던 애벌레는 잠시 후에 나비가 되어 만끽할 자유를 희망하며 행복해했을까? 아니면, 꿈틀거리던 자유마저 잃어버리게 된 것을 원망하며 그 속박에 절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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