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포지교(管鮑之交)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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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수필가 김덕원
사기(史記) 열자(列子) 편에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이 있다. 춘추시대 초엽 제(齊)나라의 두 관리였던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 같은 친구라는 뜻으로 남다른 교제를 일컬어 사용하는 말이다. 한평생 둘도 없는 정치 동료로 제나라를 섬기던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술회하였다고 한다. “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였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也)." 나에게도 이런 친구가 있다. 그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는 내가 고등학교에 막 입학한 초봄으로 기억된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면 며칠이 지나야 가까워지는 게 일반적이지만, 가끔은 하루 만에 친구가 되기도 한다. 나에게도 십여 명의 친구가 생겼다. 개학한 지 한 달쯤 지났을까, 오늘도 여전히 장난질에 한창인 친구들 사이로 처음 보는 듯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키는 훤칠하고 몸도 균형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친구는 사람을 피하는 것 같았다. 가끔 억지로 말할 때면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기 일쑤였고, 그의 행동은 보통 아이들보다도 훨씬 거칠었다. 저 아이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한동안 망설이던 나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네 이름은 뭐야?” “그건 왜 물어?” 예상대로 퉁명스럽다. 요즘 말로 하면 참 까칠한 성격이다. 괜히 말을 걸었나 보다 생각했지만, 그것이 큰 인연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모범생이 최고인 줄만 알고 살았던 나에게 그 친구와의 만남은 하루하루가 낯설고 신기하기만 했다. 나중에 깨닫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 친구는 지금까지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나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실개천에서 낚시와 투망질로 고기를 낚으며 세월은 흘러가고, 어느새 서로의 마음까지도 하나둘씩 낚아 가는 듯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그 친구를 사귀는 것이 항상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우리가 이 학년이 된 어느 날이었다.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와 함께 큰 고함이 들렸다. “야, 너희 둘, 나와!” 엉겁결에 친구와 나는 소리 나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갑자기 열두어 개도 넘는 주먹이 날아오고 몽둥이가 이리저리 나뒹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유리 깨지는 소리와 파편 떨어지는 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나는 숨을 쉴 시간조차도 없었다. 맞대응했어야만 했다. 이유도 모른 채 나는 난생처음으로 패싸움에 끼어들게 된 것이었다. 그 친구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문제를 일으켰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중학교 때부터 이미 평범하지 않은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 삼십 분쯤 지났을까? 상황이 진정되었다. 아마 이번에도 친구가 무슨 실수를 했나 보다. 나는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친구도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친구는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어서 그랬겠지만, 나는 그 친구에게 피치 못할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삼 학년이었던 어느 날, 다른 친구들이 나에게 물었다. “네 친구,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아니?” 나는 금시초문(今始初聞)한 질문에 어리둥절했다. 간질병이었다.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한편으로는 삼 년이 지나도록 친구 앞에서 말 못 할 사정을 가슴에 품고 살았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내 친구는 속 마음을 털어 놓았다. 아주 어렸을 적 술에 만취해 돌아온 아버지가 갑자기 자고 있던 세 돌을 겨우 넘긴 그 친구를 이유 없이 물속에 던졌다고 한다. 너무 놀란 친구는 그 이후로 가끔 간질을 앓게 되었는데, 점점 증세가 악화되어 지금은 하루도 약을 거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친구가 다른 아이들과 쉽게 어울릴 수 없었던 이유를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아버지에 대한 극한 증오심이 불타고 있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이 친구와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연을 맺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 친구를 싫어했지만 나는 그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항상 그 친구의 편이 되어 주었다. 그 친구를 잃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친구로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 역시 내 마음을 알아버린 모양이었다. 고맙게도 새롭게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미워하는 마음을 떨쳐버리고 특수교육학과에 들어가 자기처럼 힘든 사람들을 돌보며 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하루는 그 친구 일로 학교 도서관에 늦게까지 남아 있게 되었는데, 춥기도 하고 버스도 끊어진 터라 친구와 나는 도서관 열람실에 들어가 가까스로 한기를 피하며 잠을 청하기로 했다. 문제는 다음 날 아침이었다. 너무 춥기도 하고 영양도 부족해서였는지, 내 얼굴의 반쪽이 움직이질 않았다. 아무리 웃어도 눈은 감기지 않았고, 입은 볼 쪽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 뿐이었다.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나는 시골집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하지만 친구에 대한 원망은커녕 한 달밖에 남지 않은 대학입시를 앞두고 친구를 떠나려 하니 서운한 마음에 가슴이 메어왔다. 그렇게 안면 마비증과 씨름하며 한 달 정도를 지냈을까? 나는 가까스로 대학입시를 치렀다. 오랜만에 친구도 만났다. 그런데 친구가 지원한 학과의 경쟁률이 보통이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고대하던 특수교육학과에 합격하지 못했다고 했다. “내 주제에 무엇을 바라겠어. 그냥 그럭저럭 살 거야!” 친구는 울상이 되어 세상이 자기를 버렸노라고 신세 한탄을 했다. 나는 그 친구를 데리고 다시 대학교로 갔다. 그리고 임상병리학과 입학원서를 구매해 내용을 채워 넣은 후, 내 임의대로 제출해 버렸다. 꼭 원하는 학과가 아니어도 같은 직종이라면 친구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썩 내켜 하지 않는 모양이기는 했지만, 그 친구는 내 말을 따라주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서로 다른 지역으로 학교에 갔고, 바쁜 생활에 쫓기는 바람에 오랜 세월을 만날 수가 없었다.
93년 어느 가을날, 내가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몇몇 친구들이 식장에 와 주었다. 그런데 친구들 사이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친구, 장가가는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렇게 십 년 동안이나 보고 싶어 했던 옛 친구를 드디어 보게 된 것이다. 친구는 십 년 세월을 한숨에 담아내었다. 그때 지원했던 병리학과에 합격하여 공부를 잘 마쳤고, 지병 때문에 군대도 면제가 되어 바로 직장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서울의 모 병원 병리실장으로 일하면서, 함께 일하던 간호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딸 하나를 두고 재미나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난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나는 그 친구의 성공이 내 것인 양 가슴이 뛰었다. 그만큼 서로를 믿었고 성공하기를 바랐던 친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얼마 안 되어 나는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왔고, 지금은 이민자가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십 년, 그리고 또 십 년이 지나갔다. 바람 따라 흘러간 세월 앞에 문뜩 설 때면, 그때 가을바람과 함께 들려오던 그 친구의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그 친구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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